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센고쿠 시대 (문단 편집) == 특징 == 센고쿠 시대는 이 영주-무사-농민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일본 영토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전국의 [[영주(중세)|영주]]들이 가장 신경쓰는 게 바로 '''부국강병'''책으로, 먼저 [[농업]] 생산량을 극대화시켜야만 병사의 수를 늘릴 수 있었다. 그래서 영주들은 저수지와 개간을 진행하였고 그 결과 일본의 농지는 [[오닌의 난]] 이전보다 약 1.8배로 증가하게 되었다. 또한 각 영주들은 검지(檢地)[* 토지 측량과 산출량 확인]를 실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개 다이묘가 자기 영지에 대해 제대로 된 검지를 실시한다는 건 의외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검지는 쉽게 말하자면 세무조사를 통한 징세 꼬투리 잡기였기 때문에 수하들을 극도로 자극하게 되는데, 실질적으로 지역 호족 연합세력의 수장 이상의 권력을 가지지 못한 다이묘들이 이렇게 부하들을 자극해봐야 좋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태합검지(太閤檢地)를 실시하자 내심 환영하는 다이묘들이 많았다. 부하들의 토지에 세금을 물려 영지 장악력을 강화하고 싶었는데 히데요시라는 [[가불기]]가 생겼으니까. 부하들이 투덜대도 히데요시 탓으로 돌리면 뭐 어쩌겠는가? 자기도 도요토미 정권에 대한 동원부담이 커지겠지만 그건 반대로 말하면 자기 수익이 늘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리고 행정능력이 부족하던 시기라 [[고쿠]] 단위로 쪼개지는 것이 통치의 정밀함 측면에서는 더 나았다. 각 세력들은 보다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사무라이]]들과 [[토호]]들을 가신단으로 편입시키고 연공을 일원화시킨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로 전국시대가 끝난 후 농업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늘어 일본 전체의 석고는 1598년 태합검지 종료시 1,850만 석, 1604년~1610년 게이초 고초(慶長郷帳)에서는 2,200만 석까지 늘어나게 된다. 또한 치열한 경쟁체제에서 승기를 잡기 위하여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거나 개발하는 데에도 매우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때마침 [[유럽]]의 [[신항로 개척]]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서양 문물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조총과 같은 신무기도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결과적으로 반복되는 전쟁이 군사력이든 농업생산력이든 높은 상태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될 긴장 상황을 유발하고 지속시켰기 때문에 이전까지만 해도 [[한반도]]와 큰 차이가 없었던 일본의 국력은 이 시기부터 한반도를 크게 능가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세종(조선)|세종]] 이래 나라 전체를 뒤흔들 수준의 국가적 변동 없이 정체된 상황을 유지한 [[조선]]의 상황과 맞물렸으며 그 결과가 [[임진왜란]]이라는 대(大) 전쟁으로 이어지고야 만다. 즉 토호들의 과도한 수탈을 방지하는 한편, 수취를 하나로 통일하여 대영주가 아닌 이상 영주들은 무사들에게 농민들에게 일원적으로 받아낸 [[쌀]]을 [[녹봉]]으로 지급하였고, 무사들을 성하 마을인 조카마치에 거주하게 함으로써 소집과 감시를 편하게 하였다. 봉록을 받는 무사들은 전쟁의 빠른 소집과 감시를 위해 성하 마을에 살게 되고, 이런 거대한 소비 집단을 위해 직인, 상인들이 대규모로 마을에 살게 된다. 이로써 영주들은 농민과 무사, 상공업자들을 효율적으로 동원할수 있게 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이르러 전국 단위로 총동원 체제가 가능하게 되었다. 당연히 중간 단계가 생략된 연공의 일원화, 즉 조세의 일원화는 농민들에게 가중되는 부담이 줄어들게 했는데 이들 농민으로 하여금 공동의 운명체라고 느끼게 하는 게 중요했다고 여겼다. 만약 민심이 이반해버리면 다른 영주가 침공했을 경우 살아남기 힘들어지니까[* 더구나 이것은 자신의 세력을 강화할 수 있는 한 수단이었기에 무엇보다도 중요하고도 예민한 문제였다.]. 어찌 보면 이후 [[에도 시대]]의 기반을 닦고 지역별 색채를 강화시킨 게 이 시기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실제 [[일본]] 각 지역에서 지역의 상징으로 유명한 인물들 가운데는 이 시기 다이묘들이 많다. 여러 [[불교]] 종파들도 [[승병]]으로 군사력을 구축해 패권 다툼에 끼어 들었다. 정토진종의 혼간지(本願寺, [[잇코잇키]]), 진언종의 네고로지(根来寺), 천태종의 엔랴쿠지(延暦寺) 등등. 보통 한국에서는 [[승병]]을 ‘나라를 위해 무기를 든 승려들’[* 사실 한국사에서도 [[나말여초]]의 승병, [[무신정권]] 시대에 [[이의방]], [[최충헌]], [[최우]] 등 무신 권력자들이 기존 왕실과 [[문벌귀족]]들이 후원하던 [[교종]]을 억압하고 [[선종(불교)|선종]]을 키우는 과정에서 교종 사찰들의 군사력을 동원해 반란을 일으킨 사례가 많은 것을 보면 고려시대까지는 사원이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많은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일종의 호족과 같은 성격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라고 생각하지만, 일본 전국시대의 승병은 한국의 [[후삼국시대]] 때처럼 지금으로 말하면 [[정치깡패]]에 비견되는 무장 조직과 다를 바 없다. [[절(불교)|절]]을 거점으로 삼고 주변 마을, 적대 교파 [[약탈]]은 기본이고, [[낭인]]들을 매수하여 머리만 깎아놓고 [[용병]] 조직처럼 움직이기도 했으며, 심지어 종교에 힘입어 [[잇키]]를 일으켜 영주를 내치고 [[영지(역사)|영지]]를 차지해 거대한 교단 영지를 세워 대영주랑 맞짱뜨기도 하였다. 당시 일본의 사원은 단순한 종교단체가 아니라 막대한 토지를 보유하고 중세 서양 기독교의 [[대주교]], [[주교]]들처럼 사실상 독자적인 영지를 가진 세속적인 군사세력이었던 것이다. 전국시대 초기의 권세가 [[호소카와 마사모토]]는 자신에게 적대하는 [[아사쿠라]], [[하타케야마]] 등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잇코잇키]]를 뒤에서 조장해서 아사쿠라, 하타케야마와 싸우게 하기도 했다.[* https://blog.naver.com/jo9796/222482950421] 이로 인해 [[정토진종]]은 [[무로마치 바쿠후]]와 긴밀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오다 노부나가]]가 괜히 불교를 깨부수고 다닌 게 아니다. 일반적으로 전국시대 다이묘들은 그 지역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던, [[한국인]] 시각에서는 '한 지방의 절대 군주' 같은 자리로 연상하기 쉬운데, 대부분의 전국다이묘는 [[후한]]말 [[삼국지]]의 [[군웅]]들같이 그 지역 호족이나 토호, 유력 무사 등의 연합맹주와 비슷한 위치였던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다이묘들은 [[양판소]] [[영지물]]이나 전국시대를 다룬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자기 독단적으로만 통치를 할 수 있던 게 아니라 이런 지역 유력자들이나 가신들의 눈치를 봐야만 했고, 이들과의 합의나 협조 없이는 영지를 운영하는 데 [[김성모/작품 및 유행어|애로사항이 꽃피거나]], 심지어는 [[하극상]]을 당하는 일도 많았다. 하다못해 그 유명한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이나 서국 제일의 다이묘라는 [[모리 모토나리]]도 결국 이 '지역 연합맹주'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 또한 전국시대에는 토도 다카토라처럼 가신이 주군을 배신하는 하극상이나, 가신이 다른 주군에게 옮겨가거나, 한 번에 두 가문을 섬기는 행동 등이 일상다반사였다. 어떤 가문에서 공을 세우고 그 전공을 치하하는 표창장 겸 경력증명서 역할을 한 문서인 '간조(感狀)'를 받아서 다른 가문으로 옮겨가거나, 주군에게 개인적으로 불만이 많았다거나, 다른 가문으로부터 더 좋은 조건을 제시받거나 하면 가문을 옮겨가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이렇게 주군을 바꾸는 행동이 '[[배신]]'이라는 의리 없는 행동으로 여겨진 것도 아니었고 흠잡을 만한 일로 여겨지지도 않았다. 심지어는 무사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다른 일할 곳을 찾겠다고 다이묘에게 말하면 다이묘가 오히려 다른 가문 다이묘에게 보내는 추천장을 써주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대다이묘일수록 장수들의 인질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배신도 넘쳐나는 상황이다보니 다이묘들도 서로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배반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처럼 나름 고쿠타카를 지닌 다이묘라 하더라도 사나다 마사유키와 같은 소규모 다이묘를 이용해놓고 팽해버리는 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 중 소다이묘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규모있는 다이묘에게 보호요청을 하며 이 다이묘의 비호 아래에서 지내다가도 그 다이묘가 상대방 다이묘에게 위험해지면 바로 상대편측 다이묘에 붙는 일도 있었다. 물론 이들은 신의가 없다며 손가락질은 받을지언정 지역 안정화에 최적화된 인물이라 기용하였다. 이렇게 다이묘들끼리도 배신이 넘치다보니 생각해낸 묘수가 바로 '''정략결혼'''인데 자손들이 정략결혼을 진행한다. 신랑측 - 신부측 다이묘 둘 중 하나가 공격 받는데도 다른 한 쪽이 지원을 보내지 않는다면 피도 눈물도 없이 자식도 버리는 이미지가 붙는데다가 다이묘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의 혈육은 지키고 싶기 마련이기에 정략결혼은 사실상 동맹이나 다름없는 제스쳐였다. 물론 [[토리이 모토타다]], [[야마나카 유키모리]] 등 목숨을 걸고 주군을 지킨 충신들도 많지만, 이렇듯 흔히 퍼진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무라이'라는 이미지는 전국시대 무사의 실상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고 오히려 주는 만큼은 확실히 일하고 도리를 다한다는 '[[용병]]'이나 오늘날 [[직장생활]]을 하는 [[직장인]]처럼 시대를 살아간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실제로 일본에서 전국시대를 해설하는 교양 프로그램이나 서적, 사극 등에서는 전국시대 사무라이 사회를 직장생활에 비유해서 해설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유교]]의 기본적인 사상들이 장려되기 시작한 것은 에도 시대부터이며, 그 전까지의 유교는 상류 계층의 학문 겸 [[제왕학]]의 일종이었을 뿐이다.][* 이런 전국시대 무사들의 가치관을 제대로 보여주는 예가 [[임진왜란]] 때 조선에 투항한 [[항왜]]를 들 수 있다. 오늘날 일본의 시각에서야 이들은 [[매국노]] 취급을 받을 수 있지만, 당시 일본은 오랜 분열기로 인해 '우리는 [[일본인]]'이라는 국가관이나 정체성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항왜들의 상식으로는 조선에 투항하는 것을 단순히 '원래 자신이 섬기던 주군'에서 [[선조]]라는 또다른 주군에게 옮겨가는 것으로 인식했다는 이야기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주군에게 도리를 다하는 것을 경시한 것도 절대 아니었으며[* 주군에게 도리와 충정을 다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 것은 배신이 난무한 전국시대에서 영주들 개개인에게도 당연한 것이었다. 때문에 대세가 기울어 [[다케다 카츠요리]]를 배신하여 죽게 만든 오야마다 노부시게가 오히려 [[오다 노부나가]]의 명령에 의해 처형당하기도 했으며, 주군에 대한 도리를 지키고 전사한 유명한 무사를 배출한 무사 가문은 나름 대접을 받으며 이후 구직 활동에서 선조의 이름덕을 보기도 했다.] 무사도의 덕목으로써 한 가문에 오래도록 충성을 바치는 무사도 없던 것은 아니라서 이렇게 한 가문에서 오래 일한 무사는 '[[후다이]](譜代)'라고 해서 가문의 측근 중신으로 중용되었다. 또한 전국시대에는 같은 [[일본인]]들을 외국에 [[노예]]로 갖다 팔아버리는 경우가 매우 많았었는데 이는 당시 수출할 상품이 없던 일본이 긴 전쟁 기간 동안 외국에 판 주력 상품이 다름아닌 자국민 즉, 일본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국시대 당시 일본은 농민들이나 전쟁 포로같은 자국 일본인들을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들마냥 해외에 노예로 팔아먹는 사례가 아주 많았다.[* 심지어 흑인 노예의 경우처럼 구매자는 똑같이 서양인들이었다.] 주로 서양인들과 교류가 잦은 [[규슈]] 지방을 중심으로 일본인 노예를 팔아넘겼는데, 이는 히데요시가 선교사 추방령을 고수하는 원인이 되었다. 비록 선교사들이 노예 무역에 부정적이었으며, 실제로 1598년에 일본인도 아닌 조선인 노예 무역을 파문으로 위협하여[* [[역사스페셜]] [[https://vod.kbs.co.kr/index.html?source=episode&sname=vod&stype=vod&program_code=T2009-0419&program_id=PS-2011177101-01-000&broadcast_complete_yn=Y&local_station_code=00§ion_code=05§ion_sub_code=08|2012년 3월 8일 방영분]]. 31분 20초-33분 45초] 제재할 정도로 이 문제를 심각하게 여긴 것은 분명하지만, 일본인과 서양인 교류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던 선교사의 포지션이 히데요시의 입장에서 선교사를 의심할 동기를 준 것이다.[* 「발리냐노{{{-2 (Alessandro Valignano, S.I., 1539~1606))}}} 입장에서는 관백의 정치적인 태도가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1587년의 첫 추방령은 더 큰 광풍에 대한 경고로 보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포르투갈 상인들의 행동도 선교사들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의 아시아 거점지인 마카오와 일본을 오가며 비단과 무기 등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싣고 갔다가 은, 수공예품과 향신료를 싣고 왔는데 거기에는 일본인 노예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관백]]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승리의 카드’인 포르투갈인들과의 무역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들과의 무역을 위해서는 신부들이 일본에 있어야 했다. 일본인들은 신부들이 없으면 포르투갈 상인들과 대화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191353|김혜경. 〈왜란 시기 예수회 선교사들의 일본과 조선 인식 - 순찰사 알렉산드로 발리냐노의 일본 방문을 중심으로 -〉]]] 이 노예 수출이 역사에 남긴 흔적 중 하나가 네덜란드에 전승되어 오는 불쌍한 일본 도깨비 설화이다.[* 네덜란드 앤트워프에 무역선에 딸려들어온 일본 도깨비가 갖은 핍박과 고초를 겪다가(이 설화에서는 도깨비가 별 힘도 못 쓰는 잡몹으로 그려져서 배가 고파서 가정집 부엌에 뒤지러 들어갔다가 하녀한테 빗자루로 두들겨맞아 쫓겨날 정도이다.) 결국 낙심 끝에 굶어죽고 말았는데 어떤 사람이 그 얼굴을 본따 "하나님의 기도로 잡은 악마의 형상입니다"라고 [[장사하자|기와를 구워 팔아 떼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다. [[https://brunch.co.kr/@flatb201/144|브런치 기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